12장 4-6절
12장 4-6절
וַיֵּ֣לֶךְ אַבְרָ֗ם כַּאֲשֶׁ֨ר דִּבֶּ֤ר אֵלָיו֙ יְהוָ֔ה וַיֵּ֥לֶךְ אִתֹּ֖ו לֹ֑וט וְאַבְרָ֗ם בֶּן־חָמֵ֤שׁ שָׁנִים֙ וְשִׁבְעִ֣ים שָׁנָ֔ה בְּצֵאתֹ֖ו מֵחָרָֽן׃
וַיִּקַּ֣ח אַבְרָם֩ אֶת־שָׂרַ֨י אִשְׁתֹּ֜ו וְאֶת־לֹ֣וט בֶּן־אָחִ֗יו וְאֶת־כָּל־רְכוּשָׁם֙ אֲשֶׁ֣ר רָכָ֔שׁוּ וְאֶת־הַנֶּ֖פֶשׁ אֲשֶׁר־עָשׂ֣וּ בְחָרָ֑ן וַיֵּצְא֗וּ לָלֶ֨כֶת֙ אַ֣רְצָה כְּנַ֔עַן וַיָּבֹ֖אוּ אַ֥רְצָה כְּנָֽעַן׃
וַיַּעֲבֹ֤ר אַבְרָם֙ בָּאָ֔רֶץ עַ֚ד מְקֹ֣ום שְׁכֶ֔ם עַ֖ד אֵלֹ֣ון מֹורֶ֑ה וְהַֽכְּנַעֲנִ֖י אָ֥ז בָּאָֽרֶץ׃
와예렉(떠났다) 아브람 카아세르(관계사) 디베르(말했다) 에라우(그에게) 야훼
와예렉(갔다) 이토(그에게) 롯 웨아브람 벤(나이) 하메스(오) 샤님(년) 웨쉬빔(칠십) 샤나(년) 베체토(떠났을 때) 메하란(하란으로부터)
와익카(이끌고) 아브람 에트(격조사) 샤라이(사래) 이쉬토(그의 아내) 웨에트(그리고) 롯 벤(아들) 아히우(그의 형제) 콜(모든) 레쿠샴(그들의 소유) 아세르(관계사) 라카슈(그들이 모았다) 웨에트(그리고) 한네페쉬(백성) 아세르(관계사) 아슈(그들이 얻었다) 베하란(하란에서) 와예체우(그들이 떠났다) 라렉켓(가다) 아르샤(땅으로) 가나안
와야부(그들이 왔던) 아르챠(땅으로) 가나안
와야보르(지나갔다) 아브람 바아레츠(땅) 에드(으로) 마콤(장소) 쉐켐(세겜) 아드(~까지) 엘론(상수리 나무) 모레
웨하커나아니(가나안 사람이 있었다) 아즈(그때) 바아레츠(땅)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개역개정)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가나안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하란에 정착했다. 그리고 아버지 데라가 죽고 난 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한 것이다. 성도 역시 하나님 나라 성전을 세우기 전에 육신에 반응하는 모습을 본다. 육신인 옛사람의 성전을 완전히 떠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모습이다. 육신에 반응하다가 결국 옛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나안)로 향하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를 향하다가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분은 말씀이신 호 로고스이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진 자의 모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성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성도는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하나님 나라를 상징)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고향 친척 아비 집이 무엇인가? 고향이라는 히브리 원어의 에렛츠는
땅이다. 이 땅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그곳(갈대아 우르)이라는 의미와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이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질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로 마음을 향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가 되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9-10절에서『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그래서 이 땅에서는 항상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이다. 11장 15-16절에서『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천국을 발견한 자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을 집중해서 천국에 대한 말씀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있는 것들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21-22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부자청년은 재물과 영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재물을 택한 예가 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친척은 외부 세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나왔다. 롯(어근:라하트)의 이름의 의미는 활활타다, 불을 붙이다, 불태우다 등의 의미다.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신명기 32장 22절에서『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라하트).』시편 97편
3절에서『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라하트).』말라기 4장 1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라하트)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친척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구약성경의
열왕기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화를 내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의 강대국에 의지하는
것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척 등에 대한 애착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은 단지 이 땅에서 혈연으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적으로
연결된 분이라는 것이다. 혈연은 죽음으로 사라지지만, 영적인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라르(주권을
행하다, 통치자)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사래는 지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샤토(אִשְׁתֹּ֜ו 기본형은 이샤)는 돕는 베필이다. 아들을 낳는 것이다. 아들은 메시야와 연결된다. 돕는 베필인데, 이름의 의미로 보면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임이며, 아들이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 21-22절에서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이다. 오늘날에 적용하면,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에서『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은 가족간에 나누는 것보다 비할 수 없는
너무나 큰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아브람과 사래와 롯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자기를
내세우는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우상)을 다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가야할 곳이 하나님이 보여줄 땅이다. 하나님이 보여줄 땅은 성경(창세기 1-3장) 안에
있다. 가나안(그리스도)이
곧 하나님 나라이며, 원래 돌아 가야할 곳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의미는 굽히다, 정복하다, 낮추다, 겸손하다, 굴복시키다 등의 의미다.
가나안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의 모습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내려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에
취해서 그의 장막에서 벌거벗고 잤는데,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장막 안을 엿보고 할아버지의 모습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영적으로는 노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신을 완전히 벗은 상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모습인데, 함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는데, 결국 함을 저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함의 계열은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없애라고 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다름아닌 나 자신도 되는 것이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걸림돌이 바로 나라는 옛사람인
것이다.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옛사람이다. 그 옛사람을
제거하라는 말씀이다.
성도가 원래 돌아가야 할 그곳은 바로 그리스도 안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보여줄 그곳으로
가라는 것은 성도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은 신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물질세계가 주는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라고 하시는데, 많은 경우 정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신도들에게『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있다.
『땅으로 가라』는 말은 계속적인 행보를
의미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멈추지 말고, 계속 전진해서 가라는 것이다. 롯의 처에 대한 말씀이 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죽는 날까지 계속
진행되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7장 31-35절에서『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성도가 뒤를 돌아다보면,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날라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긴 역사 속에서 그 채찍의 경험을 당했다. 성도들은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자들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나님이
지시한 후에 목적지로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렀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문명의 마음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것을 암시한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화려하고 음란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서 아버지 데라는 묻히게 된다. 또한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옴으로서
이방 땅으로 가는 두려움에서 친척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양떼들로
인해서 롯과 헤어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그네가 되어서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의 시작과 종말을 발견해야만 한다. 아브라함이『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 땅을 지나가는 것이다. 나그네처럼 잠깐 들렀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지만 그 땅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나라가 참 가나안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
아브라함은『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남방은 헤브론이다. 가나안을 통과하여 헤브론으로 간 것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여정이 이렇게 아브라함의 여정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구원의 약속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일깨워주신다.『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가나안에
들어가서 찾아간 곳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른 것이다.
모레는 히브리어로 무당, 점쟁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상수리 나무는 가나안의 문란한 종교의식을 상징한다. 호세아 4장 12-13절에서『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곳이 이방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처음부터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한 백성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전쟁을 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북쪽으로부터 가나안(갈릴리
지역)을 통과하여 남방으로 내려간 것이다. 갈릴리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나, 남방은 황무지에 가까운 곳이었다.
가나안 지역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이방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 만의 풍요를 독점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간 상황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이유인 것이다.
성도가 되기 전에는 세상에 속한 자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자가 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갔을 때는 세상에서 주는 것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추악하고 어두운 것인지 모르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그 속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속성과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이 가나안처럼 풍요와 다산을
쫒는 것으로 둘러 쌓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곧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하지 않고, 처음부터 이방신전을 보게하셨는가?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계는 이 세상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이 세상 속에 있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라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풍요와 부함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살아가는
자임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믿음의 선택을 종용받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5-18절에서『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은 바로 죄악에 빠지지 않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루어가게 하신다.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인 것이다. 세상에 눈이 그대로 살아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뜬 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된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가나안은 뿌리 박고 살 땅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곳이다. 가나안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이정표와 같은 곳이다. 가나안은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히며, 성도가 싸워이겨야 하는 곳이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순례자가 평가받는 곳이기도 하다. 신명기 8장 2-3절에서『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 세겜땅 모레 상수리 나무를 통과하게 한 것은 일종의 믿음의 시험이셨다. 이 세상은 성도가 살아가는 믿음의 시험장인 것이다. 창세기 23장 2-4절에서『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이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말한다. 믿음의 선진들도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창세기 23장 6절에서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어떻게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라는 것을 인정했는가? 그들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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